오다 노부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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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다 노부토시는 에도 시대 덴도 번의 다이묘였으며,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텐도 번 지사를 역임했다. 그는 오다 노부미치의 아들로 태어나 보신 전쟁에서 텐도 번을 이끌었으며,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 궁내성 직원과 자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했으며, 1901년 4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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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도번주 - 오다 노부치카 (1751년)
오다 노부치카는 에도 시대 하타모토 출신으로 메이와 사건 이후 오바타 번주가 되었으며, 영지를 옮겨 다카하타 진야를 세우고 가문의 격식 회복에 힘썼으나 덴메이 대기근을 겪었고 그의 사후 아들 오다 노부카즈가 가문을 이었다. - 덴도번주 - 오다 스에마루
오다 스에마루는 덴도 번의 다이묘 오다 노부미치의 여섯째 아들로 태어나 형의 양자가 되어 덴도 번 지번사가 되었지만 어린 나이에 면직된 후 6세에 사망했다. - 1901년 사망 - 쇼타이왕
쇼타이왕은 류큐 왕국 제2쇼씨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자 류큐번의 번왕으로, 일본 제국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며, 류큐 왕국의 격동적인 멸망 시기를 겪었다. - 1901년 사망 - 이홍장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이홍장은 태평천국의 난 진압에 기여하고 직례총독으로서 외교를 주도하며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나, 청일 전쟁 패배와 부패 논란 등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그의 삶은 청나라 격변기와 근대화 노력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는다. - 쇼바타 오다씨 - 오다 나가마스
오다 나가마스는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 다이묘이자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워 유라쿠류를 창시한 다인으로도 유명하며, 그의 호 유라쿠는 도쿄도 유라쿠초 지명의 유래 설이 있다. - 쇼바타 오다씨 - 오다 노부나가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 전국 시대의 무장으로, 오와리 출신에서 시작하여 일본 통일을 목표로 센고쿠 시대를 지배하며 막강한 세력을 구축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오다 노부토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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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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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오다 노부토시 |
원어 이름 | 織田信敏 |
로마자 표기 | Oda Nobutoshi |
출생 | 1853년 11월 19일 |
출생지 | 에도, 도쿠가와 막부 |
사망 | 1901년 6월 6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제국 |
관직 정보 | |
직위 | 제3대 덴도 번 번주 |
재임 시작 | 1868년 |
재임 종료 | 1868년 |
이전 | 오다 노부미치 |
다음 | 오다 스에마루 |
직위 | 제5대 덴도 번 번주 |
재임 시작 | 1869년 |
재임 종료 | 1871년 |
이전 | 오다 스에마루 |
다음 | 없음 |
가문 정보 | |
씨족 | 오다 씨 (노부오 계통 노부요시 류) |
부모 | 아버지: 오다 노부미치 |
배우자 | 마쓰마에 다카히로 딸, 마스코 |
자녀 | 에이코 외 다수 |
양자 | 오다 스에마루, 오다 노부쓰네 |
기타 정보 | |
어릴 적 이름 | 도미쿠노스케 |
관위 | 종5위 하・병부대보, 종3위, 자작 |
2. 생애
오다 노부미치의 넷째 아들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다 후쿠노스케(織田富久之助)였다. 분큐 3년(1863년) 7월 3일, 아버지 노부아키의 적자가 되었다. 아내는 에조 영주 마쓰마에 다카히로의 딸이었으나, 후에 이혼했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7일, 조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정토령을 내리고, 각 번에 군사를 이끌고 상경할 것을 명했다.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동안,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우에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에도를 점령하고 1868년 초 북부 번의 ''다이묘''들에게 보고하고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명령했다.
같은 해 2월 26일, 전년부터 형세를 엿보며 상경을 늦추고 있던 아버지 노부아키는 병을 이유로 적남인 노부토시를 입락시켰다. 3월 2일, 신정부로부터 오우 진무사 선도역을 명받았다. 이에 대해, 번사 요시다 다이하치를 선도역 대리로 할 것을 청원하여 허가받았다. 3월 6일, 노부토시는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다. 3월 19일, 아버지의 은거로 인해 번주가 되었고, 4월 6일, 종5위하 병부대보에 서임되었다.
오우 진무사 선도역 대리가 된 요시다 다이하치는 화평 공작을 펼쳤지만, 쇼나이 번의 반발 등으로 대립 구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윤4월 4일, 쇼나이 번이 텐도 성하를 공격하여 성하는 모두 불탔다. 재국에 있던 아버지 노부아키와 가족들은 오우 산맥을 넘어 센다이 번 영지로 도망쳤다.
쇼나이 번의 텐도 퇴거 후, 텐도 번은 요시다 다이하치의 주도로 나가토로 번을 습격하는 등 반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윤4월 20일, 오우 진무 총독부 참모 세라 슈조가 암살당하자, 오우의 형세는 급변했다. 윤4월 22일, 노부토시는 텐도 진야에 들어갔고, 같은 날 오우 진무사 선도역 사퇴가 허가되었다. 윤4월 25일, 신정부로부터 위로금 5000JPY을 받았다. 5월 3일, 도호쿠 제 번은 오우에쓰 열번 동맹을 결성했다. 텐도 번은 동맹 측에 가담했고, 6월 17일, 요시다 다이하치에게 할복을 명했다. 이후, 텐도 번은 아키타 번 공격 등에 번사를 파견했다.
1868년 9월 18일, 덴도 번은 신정부에 항복했다. 10월 16일, 노부토시는 도쿄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11월 2일, 노부토시는 도쿄 보리사 고린지에서 근신했다. 12월 7일, 신정부는 노부토시에게 2000석 감봉과 은거를 명하고, 12월 17일 동생 히사시게마루에게 가독을 잇게 했다. 1869년 7월 18일, 히사시게마루가 어려 노부토시가 다시 번 지사가 되었다.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 지사에서 면직되었다.
1870년 11월 17일, 덴도 시 마이즈루 산에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는 건오다사(후에 건훈신사로 개칭)를 창건했다. 1871년 9월 8일, 게이오기주쿠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1872년에는 긴자 대화재로 자택이 소실되기도 했다.
1874년 1월 23일, 궁내성에 출사했고, 같은 해 2월 18일 퇴직했다. 1884년 7월 8일, 자작이 되었다. 1901년 6월 6일 사망, 향년 48세.
2. 1. 출생과 가독 상속
오다 노부미치의 넷째 아들로 에도에 있는 덴도 번 저택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오다 후쿠노스케(織田富久之助)였다. 분큐 3년(1863년) 7월 3일, 아버지 노부아키의 적자가 되었다. 아내는 에조 영주 마쓰마에 다카히로의 딸이었으나, 후에 이혼했다.게이오 4년(1868년) 1월 7일, 조바·후시미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는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정토령을 내리고, 각 번에 군사를 이끌고 상경할 것을 명했다.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동안,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우에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에도를 점령하고 1868년 초 북부 번의 ''다이묘''들에게 보고하고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명령했다.
같은해 2월 26일, 전년부터 형세를 엿보며 상경을 늦추고 있던 아버지 노부아키는 병을 이유로 적남인 노부토시를 입락시켰다. 3월 2일, 신정부로부터 오우 진무사 선도역을 명받았다. 이에 대해, 번사 요시다 다이하치를 선도역 대리로 할 것을 청원하여 허가받았다. 3월 6일, 노부토시는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다. 3월 19일, 아버지의 은거로 인해 번주가 되었고, 4월 6일, 종5위하 병부대보에 서임되었다. 이때, 오다 노부미치는 여행하기에는 너무 아프다고 선언하고 공식적으로 은퇴하여 그의 아들 오다 노부토시를 대신 보냈다. 오다 노부토시와 그의 수석 가신 요시다 다이하치는 천황군의 안내 및 호송 역할을 하도록 명령받았으며, 이들은 여전히 활동 중인 친 도쿠가와 막부 세력, 특히 인근의 쇼나이 번에 대항하여 도호쿠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2. 2. 보신 전쟁과 덴도 번
메이지 유신 당시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따르는 세력은 우에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북쪽으로 피신했다. 메이지 정부는 에도를 장악하고 1868년 초 북부 번의 ''다이묘''들에게 보고와 함께 새 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오다 노부미치는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를 선언하고 아들 오다 노부토시를 대신 보냈다. 노부토시는 천황군의 안내와 호송 임무를 맡았는데, 이들은 도쿠가와 막부를 지지하며 활동하던 세력, 특히 쇼나이 번에 대항하기 위해 도호쿠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노부토시는 쇼나이 공격에 참여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쇼나이군은 4월에 덴도 마을을 불태웠다. 막부는 재건 지원을 위해 5000료를 지원했다.
북부 번들이 오우에쓰 열반 동맹을 결성하자 덴도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1868년 9월 동맹에 합류했다. 보신 전쟁에서 친 도쿠가와 세력이 패배한 후, 노부토시는 가택 연금되었고, 동생 오다 스에마루가 ''다이묘'' 자리를 이어받았다. 번의 수입은 18,000 ''고쿠''로 줄었다. 노부토시는 스에마루가 어렸기 때문에 1869년 7월 번 지사 역할로 덴도에 복귀할 수 있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이 사라지면서 노부토시는 지사직을 맡게 되었다.
2. 3.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동안,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우에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북쪽으로 도망쳤다.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에도를 점령하고 1868년 초 북부 번의 ''다이묘''들에게 보고하고 새로운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도록 명령했다.오다 노부미치는 여행하기에는 너무 아프다고 선언하고 공식적으로 은퇴하여 그의 아들 오다 노부토시를 대신 보냈다. 오다 노부토시는 천황군의 안내 및 호송 역할을 하도록 명령받았으며, 이들은 여전히 활동 중인 친 도쿠가와 막부 세력, 특히 인근의 쇼나이 번에 대항하여 도호쿠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오다 노부토시는 쇼나이 공격에 참여했고, 보복으로 쇼나이군은 4월에 덴도 마을을 불태웠다. 도쿠가와 막부는 재건을 돕기 위해 5000료의 구호 기금을 제공했다.
북부 번들이 제국 정부에 대항하여 오우에쓰 열반 동맹을 결성하자, 덴도는 처음에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1868년 9월에 동맹에 가입했다. 보신 전쟁에서 친 도쿠가와 세력이 패배한 후, 노부토시는 가족 사찰인 고린지에 도쿄에 가택 연금되었고, 그의 형제 오다 스에마루가 ''다이묘''로 교체되었다. 번의 수입은 18,000 ''고쿠''로 감소했다. 노부토시는 스에마루가 아직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1869년 7월에 번 지사 역할로 덴도로 돌아갈 수 있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이 폐지되었고, 노부토시는 지사로 임명되었다. 1874년, 노부토시는 궁내성 직원이 되어 새로운 메이지 정부에 합류했다. 1884년, 그는 화족 작위 제도를 통해 자작(''시샤쿠'') 작위를 받았다. 그는 또한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입학하여 영어를 공부했다.
2. 4. 말년
메이지 유신 당시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따르던 세력은 우에노 전투에서 패배하고 북쪽으로 피신했다. 메이지 정부는 에도를 장악하고 1868년 초 북부 번의 ''다이묘''들에게 보고와 함께 신정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할 것을 명령했다.오다 노부미치는 병을 이유로 공식 은퇴하고, 아들 오다 노부토시를 대신 보냈다. 노부토시와 그의 가신 요시다 다이하치는 천황군의 안내 및 호송 역할을 맡아, 도쿠가와 막부 잔존 세력, 특히 쇼나이 번에 대항하기 위해 도호쿠 지방으로 파견되었다. 노부토시는 쇼나이 공격에 참여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쇼나이군은 4월에 덴도 마을을 불태웠다. 막부는 재건 지원을 위해 5000료를 지원했다. 이후 북부 번들이 오우에쓰 열반 동맹을 결성하자 덴도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으나, 1868년 9월 동맹에 가담했다. 보신 전쟁에서 도쿠가와 측이 패배한 후, 노부토시는 도쿄의 고린지에 가택 연금되었고, 그의 형제 오다 스에마루가 ''다이묘'' 자리를 이어받았다. 번 수입은 18000고쿠로 줄었다. 1869년 7월, 노부토시는 스에마루가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번 지사 역할로 덴도에 복귀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이 폐지되자 노부토시는 지사로 임명되었다. 1874년에는 궁내성 직원이 되어 메이지 정부에 합류했고, 1884년 화족 제도를 통해 자작 작위를 받았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1868년 9월 18일, 덴도 번은 열세에 몰린 동맹을 이탈하고 신정부에 항복했다. 같은 해 10월 16일, 노부토시는 도쿄에서 근신 처분을 받았다. 11월 2일, 노부토시는 도쿄 보리사 고린지에서 근신했다. 12월 7일, 신정부는 노부토시에게 2000석 감봉과 은거를 명하고, 12월 17일 동생 히사시게마루에게 가독을 잇게 했다. 1869년 7월 18일, 히사시게마루가 어려 노부토시가 다시 번 지사가 되었다.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덴도 번 지사에서 면직되었다. 1870년 11월 17일, 덴도 시 마이즈루 산에 오다 노부나가를 모시는 건오다사(후에 건훈신사로 개칭)를 창건했다. 1871년 9월 8일, 게이오기주쿠에서 영어를 공부했다. 1872년에는 긴자 대화재로 자택이 소실되기도 했다.
1874년 1월 23일, 궁내성에 출사했고, 같은 해 2월 18일 퇴직했다. 1884년 7월 8일, 자작이 되었다. 1901년 6월 6일 사망, 향년 48세.
3. 가족 관계
부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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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마쓰마에 다카히로의 딸 마쓰마에 마스 (이혼) |
자녀 | 차녀: 오다 에이코 (자작 오다 노부쓰네의 부인) |
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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